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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기/마음 돌보기

신사임당, 허난설헌, 그리고 며느라기

by 달콤말 2020.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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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申師任堂  (1504년 ~ 1551년) 
그는 만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난 지금까지 그가 오래오래 환갑 지나서까지 살았을 줄 알았다. 
당시에는 평균수명이 짧았다고 하지만, 나는 새삼 그녀의 삶이 무척 짧게 느껴진다. 
둘째 아들인 이이(李珥)가 1537년 1월 생이라고 하니, 신사임당은 33세에 이이를 낳았고, 이이는 만 14세(현재 나이로는 중2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게 된다. 어린 이이가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고 난 뒤, 아버지가 계모를 들이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었다고 하니, 아무리 신동이고 뛰어난 이이 였지만, 한창 사춘기의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또 그토록 영특하고 앞길이 창창한 아들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고 떠났던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지도록 아팠을까. 결국 신사임당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율곡(栗谷)의 「선비행장(先妣行狀)」 '나의 어머니의 일대기' 때문이며, 짧은 인생이었지만 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침과 동시에 그의 친구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하긴 아래에 보이는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매우 유명한 '포도葡萄' 라는 그림처럼 멋진 그림을 그리는 어머니를 두었다면, 그 누가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포도葡萄, 비단에 수묵, 31.5×21.7㎝(그림 크기), 간송미술관

그런데 이이의 효심(?)은 그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신사임당은 혼인도 친정에서 했고, 3년 후에야 시어머니를 처음 만났다. 게다가 결혼 후 19년(1541)이 지나서야 친정인 강릉을 떠나 서울 시댁으로 간다. 사임당의 모친인 이씨도 혼인 후 16년 동안 친정에서 따로 살았다.
신사임당이 서울 시댁으로 간 이유도 “시어머니 홍씨가 이미 늙어 가사를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친정어머니를 사랑하지만, 시어머니의 노쇠함을 끝까지 외면할 수 없었기에 어쩔수 없이 서울에 간 것이다. 또 아이들의 교육과 남편의 출세 문제 등 여러가지를 고려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서울로 가는 길에 대관령 중턱에서 고향을 내려다보며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란 시에 친정 어머니를 남겨두고 가는 애절한 마음이 잘 나타난다. 또 상경 후에도 사임당은 '사친(思親)'이란 시의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란 유명한 시구대로 친정을 많이 그리워했다.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 대관령에 머물며 친정을 바라봄>
자친학발 재임영(慈親鶴髮 在臨瀛) -  늙으신 어머님은 고향에 두고
심향장안 독거정(心向長安 獨去情) -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회수북촌 시일망(回首北村 時一望) - 이따금 머리들어 고향을 바라보니
백운비하 모산청(白雲飛下 暮山靑) - 흰 구름 떠 있는 곳 저녁 산만 푸르네 
사친(思親) - 친정을 그리워함>
천리가산만첩봉(天里家山萬疊峯) - 산첩첩 내고향 천리이언만
귀심장재몽혼중(歸心長在夢魂中) - 자나깨나 꿈속에서도 돌아가고파
한송정반쌍륜월(寒松亭畔雙輪月) - 한송정가에는 두 개의 둥근 달
경포대전일진풍(鏡浦臺前一陣風) -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사상백로항취산(沙上白鷺恒聚散) - 백로는 모래 위에 모였다 흩어지고
파두어정각서동(波頭漁艇各西東) - 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하시중답임영로(何時重踏臨瀛路) - 언제나 강릉 길 다시 밟아가
채복반의슬하봉(綵服斑衣膝下縫) -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까?

허난설헌 蘭雪軒 (1563년 ~ 1589년)
허난설헌 그의 인생은 더욱 짧다. 27세에 세상을 등졌다. 두 아이를 병으로 잃고, 한 아이를 유산한 뒤다. 감히 그 심정을 헤아릴 길이 없다. 15세에 친정을 떠나 시집살이를 했다고 한다. 조선은 초기까지는 남귀여가(男歸女家)라고 해서, 신랑이 신부집에가서 혼례를 치르고, 신부 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풍습이 촌스럽다 하여, 중국을 따르도록 왕실에서부터 본을 보여(놀랍게도 세종 때) 사대부를 압박함으로써, 남자가 '장가(장인집) 가던' 것에서, 서서히 여자가 '시집 가는' 형태로 바뀌었단다. 조선 여인들을 그 후로도 오랫동안 통째로 지옥으로 빠뜨려버린 시집살이의 시작, 허난설헌은 시집살이의 첫 세대였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15세 이전의 유년 시절은 정말 행복했던 추억의 시절이었을 것이다. 남녀차별없이 배움의 기회를 준 아버지 허엽을 두었고, 어린 시절을 어머니의 친정인 강릉에서 자유롭게 보냈고, 역시 뛰어난 문장가였던 오빠 허봉과 남동생 허균을 둔, 엄친딸 허초희(난설헌의 본명)는 어린시절부터 한시를 지어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고 한다. 아래의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는 그녀의 어린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그림일 게다.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 - 아버지와 딸이 날아가는 새를 함께 바라보는 모습의 그림

불행한 결혼 생활 중에도 꾸준히 그녀는 사랑과 불행을 시로 표현하였다. 두 아이를 잃고 뱃속에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시를 지었을 그녀를 생각하니 나또한 가슴이 메어온다. 
<곡자(哭子) - 아들 딸 여의고서> 
거년상애녀(去年喪愛女) 금년상애자(今年喪愛子) -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애애광능토(哀哀廣陵土) 쌍분상대기(雙墳相對起) -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소소백양풍(蕭蕭白楊風) 귀화명송추(鬼火明松楸) -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지전소여백(紙錢招汝魄) 현주전여구(玄酒奠汝丘) - 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응지제형혼(應知弟兄魂) 야야상추유(夜夜相追遊) -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어울려 놀테지
종유복중해(縱有腹中孩) 안가기장성(安可冀長成) -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랑음황대사(浪吟黃臺詞) 혈읍비탄성(血泣悲呑聲) -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하지만 그녀가 오늘날에 높이 평가 받는 것은 단순히 한시를 잘 짓고, 자신의 불행을 아름다운 시로 승화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반가의 여식이자 며느리로 살면서도 다른 계층 여인의 삶을 애달파 할 줄 알았고, 당시의 사회 부조리를 비판할 줄 알았다는 점일 것이다. 
<빈녀음(貧女吟)  (가난한 여자의 노래)>   
개시핍용색(豈是乏容色) - 인물도 남에 비해 그리 빠지지 않고
공침복공직(工鍼復工織) - 바느질 솜씨 길쌈 솜씨도 좋건만 
소소장한문(少少長寒門) -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자란 까닭에
양매불상식(良媒不相識) - 좋은 중매자리 나서지 않네.
부대한아색(不帶寒餓色) - 춥고 굶주려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진일당창직(盡日當窓織) - 하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 
유유부모련(唯有父母憐) - 오직 내 부모님만 가엾다 생각할 뿐
사린하회식(四隣何會識) - 그 어떤 이웃이 이내 속을 알아주리오.
야구직미휴(夜久織未休) - 밤이 깊어도 짜는 손 멈추지 않고
알알명한기(戞戞鳴寒機) - 짤깍짤깍 바디 소리 차가운 울림
기중일필련(機中一匹練) - 베틀에 짜여가는 이 한 필 비단
종작하수의(綜作何誰衣) - 필경 어느 색시의 옷이 되려나.
수파금전도(手把金剪刀) - 가위로 싹둑싹둑 옷 마를 제면
야한십지직(夜寒十指直) - 추운 밤에 열 손가락 곱네.
위인작가의(爲人作嫁衣) - 시집갈 옷 삯바느질 쉴 새 없건만 
년년환독숙(年年還獨宿) - 해마다 독수공방 면할 길 없네.

'며느라기'란 '며느리' + '아기'의 준말로, 초보 며느리 일명, '새아가'를 일컫는 말이다. 
연인 사이의 애칭도 아니고, 왜 '아기'라는 호칭이 며느리에 가서 붙었을까. 바로 며느리가 너무 어렸었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은  중국의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주자가 만든 가정의례)에 규정된 혼인 연령을 참고해서,  여성의 혼인 연령을 14세 ~ 20세로 정해 놓았다. 조혼(早婚)의 시작은 『세종실록』 1427년(세종 9) 9월 17일조에 나와있다. 예조에서 ‘혼인의 연한을 정하지 않은 까닭에 세간에서 혼인을 서둘지 않아 시기를 잃게까지 된다. 이는 다만 음양(陰陽)의 화합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혹은 남에게 몸을 더럽히게까지 되어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여성들은 나이 14세에서 20세 안에 혼인하도록 하고, 이유 없이 이 기한 내에 혼인하지 않으면 혼주(婚主)를 처벌하자’고 청하여 왕(세종)의 윤허를 받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조혼을 장려하니, 부모들이 너도나도 딸자식을 일찍 시집 보내려고 한다. 집안의 부귀영화를 위해 좋은 집안과 일찌감치 정략결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13년 후, 세종 22년에는 급기야 혼인을 너무 빨리 시키지 말라며, 남자는 16세, 여자는 14세 이후에야 혼인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고 하니, 쓸데없는 규정을 만들어 오히려 백성의 자유와 행복을 빼앗고 어린 여성들을 일찍 부모로 부터 떼어놓아 결론적으로 대놓고 학대 한 것이 아닌가. 또한 결혼이라고 하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을 너무 어릴때 부모가 맘대로 정해버림으로써, 인생 전체를 저당잡히고, 부부간의 사랑을 오직 복불복에 의존해야 하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며느라기'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큰 부조리를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세종은 중국의 친영(親迎) 전통을 따라하라고 위(왕실)로부터 본을 보인다. 친영이란 중국의 혼인의례인 육례 중 하나로 신랑이 신부집에서 신부를 맞아와 자신의 집에서 혼인을 진행하는 혼례의식을 말한다. 그 이전의 우리 민족의 전통 혼인 풍습은 남귀여가(男歸女家), 즉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신부집에서 혼인생활을 시작하는 형태였다. 고구려때부터 서옥제(壻屋制)*라고 하는 제도가 있었으니, 매우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이다. 오래된 전통을 하루아침에 그 반대로 바꿀순 없다. 그렇기에 신사임당이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혼례도 신혼살림도 신부집에서 했고, 아이들이 장성하면 남편의 집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조선이 성리학의 겉포장에 갇혀 고리타분한 사회가 되어 가면서, 조금씩 친영을 따라하는 사대부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허난설헌이 그 첫 세대였던 거다. 아니, 나랏님이 왜 쓸데없이 여성들의 혼인 연령을 정해놓고, 오랜 전통을 버리고 중국의 풍습을 따르라고 하는가. 결국 조혼과 친영이라는 급작스러운 혼인제도의 변화로 인해, 그후로 몇 백년 동안 두고두고 한국 여성의 한이 되는 시집살이의 비극이 초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옥제(壻屋制): 《삼국지》〈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조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들은 말로써 혼약이 정해지면 처가에서 큰 본채 뒤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이를 서옥(壻屋, 사위집)이라 하였다. 해가 저물 무렵 남편이 처가 문 밖에 와서 이름을 밝히고 꿇어앉아 절하며 안에 들어가서 아내와 잘 수 있도록 요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청하면 아내의 부모가 별채에 들어가 자도록 허락한다.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비로소 남편 집에 살러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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